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벽제관 전투 (문단 편집) == 결과 및 영향 == 명사 [[만력제|신종]] 실록에서 이 전투를 자군의 승전이라고 기록했으나, 실상은 명군의 패배였다. 일본의 기록인 태합기에서도 평양, 개성을 빼앗기기는 했지만 명군 10만을 적은 병력으로 격파했다고 기록했다. 구체적인 데이터가 편린으로 남아있어 근거와 함께 저술한다. 전체적 병력 규모는 한국과 중국에 남아있지 않고 1924년 일제강점기시절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편찬된 '일본 전쟁의 역사 조선편' 에 기록되어 있다. 책에 따르면 조명 연합군 5만 중 선봉대 2만이 일본군 4만 중 선봉대 2만과 벽제관에서 맞붙었다. 명군은 2만 중 5천이 전사하였다. - 일본 전쟁의 역사 조선편(일본주장) 일본군은 120명이 전사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1593년 2월 5일(조선주장) 조명과 일본군 모두 500명씩 전사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1593년 2월 19일(조선주장) 일본측 수치가 과장되었고 조선 측 수치가 축소되었고 명군은 피해규모 언급이 없었으나 대패한 것이 확실하므로 조명 연합군의 피해는 500과 5000의 중간 정도에 있고 일본군 피해는 100~500으로 상당히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투에서 대패한 조명 연합군은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고, 이여송은 일본군을 추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후 조선에 눌러앉게 되었다.[* 이후 명군은 민폐만 되었다는 시각이 많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정유재란]] 때 조선군의 전선 동원 병력은 3만 명으로 [[권율]] 부대를 [[대구광역시|대구]] [[팔공산|공산]]에, 권응수 부대를 [[경주시|경주]]에, [[곽재우]] 부대를 [[창녕군|창녕]]에, 이복남(李福男) 부대를 [[나주시|나주]]에, 이시언(李時言) 부대를 [[추풍령]] 등에만 각각 배치하는 한계가 있었으나 명군은 대략 10만으로 그 전력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따지고보면 17만이나 되던 조선군이 저 정도로 축소된게 명나라가 강화협상을 질질 끌어서이다.] 또한 큰 피해에 놀란 명이 일본측에 휴전을 제안하게되는 계기가 된다. 한편 북방에서 내려오던 조명 연합군과의 공조를 위해 [[행주산성]]에 진을 치고 있었던 3천의 조선군 병력은 고립된 신세가 되고 만다. 일본군은 행주산성의 조선군에 대해 명군을 패퇴시킨 여세를 몰아 강공을 준비했는데, [[행주대첩|오히려 대패하고]] 한성에서 철수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